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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손_권혁웅
오후 다섯시가 되면 쩔걱거리며 그가 왔다
중절모를 쓴 남자, 빼빼 마른 남자, 새카맣게 탄 남자, 한손에 가위를 다른 한손에 대패를 든 남자,
씰루엣은 무서웠으나 사실은 달콤한 남자였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 녹았다
그는 가위로 우리를 잘랐고 대패로 우리를 밀었으며 부러진 나무젓가락으로 우리를 돌돌 감았다
우리는 그에게서 연애와 합격과 실연을 배웠다
우리는 욕을 할 때마다 그를 들먹거렸으나, 그는 우리에게 겨우 고장난 라디오나 양은 냄배 따위를 요구했을 뿐이다
가끔 그에게 엉뚱하게 생니를 내미는 벗도 있었으나,
그건 그 벗이, 가혹한 사랑의 댓가로 앓던 이 대신에 제출한,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확히 일곱시까지 있다가 돌아갔다
다섯시에서 일곱시 사이는 집에 돌아가기엔 너무 이르고 새로운 일을 벌이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다
그는 우리의 낮과 밤을, 첫사랑과 이별을, 그렇게 이어붙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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